저는 한 이름없는 평범한 농사꾼입니다. 인류의 기계 물질 문명이 그 어느때 보다도 발달되어 먹고 입고 자는 문제가 참으로 편리한 세상에서 저 같이 어눌하고 부족한 사람이 무엇인가 세상을 향해 말한다는 것이 어리석게 보이기도 합니다. 엄청나게 고상하고 뜻깊은 말과 글들이 넘쳐 흐르는 사람 사회에서 저 같이 이름없는 무식한 농사꾼이 무엇인가 글을 쓴다는 것이 무모한 만용인지도 모르겠고, 또 넘쳐나는 글들속에 쓸데없는 글을 하나 더 보태는 잘못을 저지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큰 지혜는 조용하나 작은 지식은 뭘 자꾸 따지느라 시끄럽다는데 제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을까 스스로를 경계하고 삼가면서 한 평범한 농사꾼의 삶을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비록 어리석고 모자란 점 투성이 일지라도 그 속에서 좁쌀한알 같은 삶의 모심이 들어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습니다.

© 진정한 자연농법의 실천은 고된 작업의 연속이다.
저는 세상에서 말하는 땅 갈지 않고 풀 뽑지 않으며 비료 농약을 않치는 자연농을 하고 있습니다. 땅 갈지 않고, 풀 뽑지 않으며 비료 농약 않치는 까닭은 차차로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로 하고, 왜 우리는 자연속에서 씨뿌리면서 살아야 하는지, 살지 않으면 안되는지 제 생각을 써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지금 단순히 자연농(법)을 소개하고자 하는것도 아니요, 과학농업이라고 하는 현재의 관행농, 또는 비료, 농약을 뿌리지 않는 대신에 미생물이나 효소, 오리, 우렁이등을 활용해 짓는 유기농(업)에 비교해서 더 능률적이고 생산적인 어떤 농사법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아름다운 초록 녹색의 지구별에 사람들이 와서 할일이 있다면 손 놀려 씨뿌리는 일 밖에 없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손 놀려 씨뿌리며 재미나게 잘 놀다 (누리다)가는 삶, 즉 대지 어머니 품에 씨뿌리며 한 세상 신명나게 잘 누리다 가는 삶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씨뿌리는 삶을 어떤 기법이나 방법으로 보지 않고 삶 그 자체로 보고 그대로 살려고 노력 합니다. 관행농법, 유기농법, 자연농법 이리고 할때 면 뒷 글자 법(法)자가 어떤 것을 대신하는 기법(技法)이나 방법(方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저에게는 진리나 생명의 참 모습을 표현하는 글자로 받아 들인다는 이야기 입니다. 진리대로 노력하는 삶을 제 철학이며 신념이며 가치관으로 삼고 있다는 말씀이지요.

흔히들 우리는 자연을 보호하고 지킨다 또는 지키자고 말합니다. 또 사람은 자연보호, 자연은 사람보호 라고도 말합니다. 산천초목 천지만물이 곧 신이요 신의 모습임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느끼고 알 수 있다면 이러한 말들속에 숨겨진 허구성을 금방 알아 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중심, 사람 잣대의 오만하고 독선적인 사고 방식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음을 볼수 있을 것이며, 이미 자연과 인간이 서로 나누어 떨어져 있으면서 자연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약탈하는 문화가 전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자연에 따르는 삶 - 자연에서 받은 것을 자연에 되돌려준다.(농사꾼의 변소)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존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말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나아가서 사람의 가치판단을 기준으로 바깥세계를 틀짓고 이 세상의 모습을 풀어 나갈수 있다는 믿음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 생각이 , 이철학이 소위 근대 과학문명의 튼튼한 주춧돌이 되었지요. 그래서 외부세계나 자연을 사람과 대립되게 보고 외부세계나 자연을 사람 뜻대로 지배하고 개조해도 무방하고 당연하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저의 좁은 생각으로는 ‘자기가 있어 이것저것이 있고, 자기가 없으면 이것저것도 없다’라고 하는 ‘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것은 ‘나’일 수는 있되 ‘참 나’는 아닌 ‘허위(虛僞)의 나’(거짓나)이고 ‘참 나’는 산천초목, 천지만물 삼라만상 모든 있는 것 그대로가 다 ‘나’인 것이라고 보는것이지요. 쪼개어 나누어 보면 ‘나’로 보이는 ‘나’밖에 없지만(있지만), 온통(모두,전체)으로 보면 우주(자연)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인 ‘나’라는 이야기 입니다. 그러므로 하위의 ‘나’가 자연의 참 모습, 생명의 참 계심을 꿰뚫어 볼수 없고 꿰뚫어 볼 수 없으니까 멋대로의 지식을 행사하고 자연을 곡해하고 파괴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요? 또 그 당연한 결과로 서로 서로를 이기고 죽여야 굴러가는 기괴하고 기이한 현대 문명을 이룩한 것이라면 너무 지나친 말이 될까요?

사실 사람은 알면 알수록 실제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봅니다. 상대적인 앎으로 어떤 절대적인 앎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고, 실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그것이 다 허상이고 허구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어머니인 자연의 뱃속, 자연의 태반에 있는 사람이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겠는가 하면 볼 수 없고 어머니 뱃속 태반을 보고 어머니라고 착각하는 것이 현재 우리가 쌓아 올린 앎(지식)이 아닐까 생각 합니다.

왜 제가 이렇듯 장황하게 떠들어 대는가 하면, 사실은 제 나름대로 지금 광폭하게 내달리는 물질기계문명, 정신문명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고 자연 어머니 품에 제 몸을 내 맡겼기 때문이고, 또 손놀려 씨뿌리다 보면 배추님, 고추님, 볏님, 보리님, 밀님, 풀님등 모든님들이 우리는 하나다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느낌속에서 무한한 기쁨을 주시는대 그럴수록 우리는 아무것도 알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구나, 그저 온 삶을 내맡기고 모든 것이 완전하고 아름답게 펼쳐진(갖추어진) 신의 뜰에서 재미지게 놀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삶이 날마다 잔치요 축제요 기쁨인 것을 말하려다 보니 불완전한 사람의 지식을 축적한다고 해서 자연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더욱더 모르게 될 뿐이며, 산천초목 천지만물이 신이며 우리와 한 몸이다라는 것을 서투르게 표현하다보니 데카르트까지 들먹인 것 같습니다. 아아, 삶은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요 누리는 것이고, 생명은 쪼갬이 아니라 모둠인것을....

© 가공되지 않은 천연의 재료로 만들어진 농사꾼의 밥상

일찍이 제 삶의 스승이시자 생명의 벗님이신 자연의 농부께서 읊은 시를 한수 옮겨 적어 보겠습니다. 저는 죽을 때 까지 이 시대로 살고 싶답니다.

지렁이 흙먹어 모래성 쌓고
개미들 땅굴파 술래잡기해
거미는 줄늘어 재주 부리고
벌나비 날으며 꽃 중매서지
이몸은 손놀려 씨앗 뿌리네
소꿉놀이 잊은삶 언제인가요
새소리 들은지 언제인가요
물소리 들은지 언제인가요
꽃향기 맡은지 언제인가요
만물은 소꿉놀이 잘도 하시는데(하시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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