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시장은 사람들의 삶과 떼어 낼 수 없는 영역으로 존재해 왔다. 그리고 그 형태야 어찌 됐든 앞으로도 사람들의 한 영역으로서의 위치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

시장은 우선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 이다. 그리고 그들은 물화교역과 정보의 교환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갖고 모인다. 또한 시장은 이른바 ‘장터’ 또는 ‘장판’ 이라 불리운다. 이는 시장이 주기적 또는 지속적으로 교역이 이루어지던 한정된 장소가 아닌 사회·문화·정치 경제 등 관련 분야가 한데 어우러진 열려있는 삶의 총체적 마당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 우리의 전통적인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장터는 단순한 상거래가 일어나는 장소를 뛰어넘어 민족의 풍습을 담고 있는 생활의 현장이자 모임의 터였다. 그리고 시장은 바로 삶의 터전이요. 현실로서 인간 군상(群像)들의 삶의 진지함과 생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동안 1862년 농민항쟁이나 3·1 운동을 비롯한 각종 민중집회나 선거유세 또한 장터에서 행해지고 있음은 우연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민중들의 역사 면면히 흐르는 삶의 터전
장시(場市)는 15세기 후반에 처음으로 나타나, 16세기에 전국 각지로 확산되어 정기 시장으로 자리 잡아 간다. 최초의 장시가 기록된 문헌은 <성종실록>으로 전라도 지역에서 흉년의 자구책으로 시포(市鋪)를 열고 장문(場門)이라 칭하는 교환, 교역기구를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이 장문이 바로 시장의 시초로 흉년이 들자 특히 면(綿)의 기근으로 이것을 취득하고자 다른 물자를 구입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여러 읍들은 기존의 유통기구와는 상관없이 별도로 교역처를 마련하여 매월 두차례씩 필요물자를 교역하게 되었고, 이러한 교역처는 그 편의성 때문에 급속히 확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시(場市)가 처음으로 열린곳은 바로 전라도였고, 전라도에서도 함평의 인근 지역인 나주, 무안 등의 여러 읍은 서남해안지역이면서 영산강을 가운데 끼고 나주평야가 널찍하게 펼쳐져 있는 미곡지대로 물산이 풍부한 곳이었다. 이렇듯 물산이 풍부하니 교역 또한 번성했을 것이고 시장 또한 다른 지역보다 먼저 출현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함평은 언제부터 시장이 출현했는가? 정확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지만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1770년 간행된 <동국문헌비고>에 함평에 읍내장(함평읍), 망운장(현 무안 현경면), 선치장(해보면), 나산장(나산면), 사천장(신광면) 등 5기의 시장이 개설되어 있음이 나타난다.

15세기 후반에 이미 나주와 무안에 장문이 출현했고 18세기 문헌에 5기의 시장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면 인근 지역인 함평 또한 15세기 후반 전후에 시장이 출현하였음을 유추하는데는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15세기 후반 흉년을 극복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열린 장시는 생산력의 발달과 교역의 발달 등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여 16세기 말에는 전국적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이후 시장은 화폐경제에 영향을 끼치게 되고, 상품 매매의 장소로써 뿐 아니라 민중들의 여론장소로서 또 대중문화의 발상지로서 기능을 담당하며 21세기를 바라보는 현재까지 그 질긴 생명력으로 서민들의 삶의 공간이 되었던 것이다.

민초들의 꿈과 희망 서린 곳
장터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단지 물건을 사고 팔 사람만 모이는 곳이 아니다. 습관적으로 모인다. 장터는 바로 민중들의 전통적 생활에 삶의 맥박을 공급하던 심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구한말 조선을 방문한 한 외국인의 기록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조선 사람들의 최대의 즐거움은 장을 보러 가는 일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말해서 조선에는 상점이 거의 없고 매 5일 또는 6일만에 장이 열리고 그곳에서 자기가 만든 물건을 바꾸고 자기의 의견을 교환하기 때문이다.…

장터에서는 물건을 팔고 사고, 행상을 하고 남의 얘기를 늘어놓는 일 외에 기분풀이로 술마시고 싸우는 일이 허다하다. 옷감을 사러 갔다가 빈털털이가 되어 돌아오는 농부도 흔히 있지만 그들은 마냥 즐겁기만 하다. 그들은 차라리 지긋지긋하리 만큼 단조로운 생활을 벗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은 1907년 우리 민족의 애환이 서리니 재래시장을 묘사한 그리피스의 『子의 나라 韓國』중 「조선의 경제사정」의 일부분이다. 여기서 말하듯이 우리의 전통 시장은 의견 교환도 하고, 기분풀이도 하고, 술 마시고 싸우기도 하는 그런 곳이었다. 한마디로 즐거운 곳이었고 바깥세상으로 통하는 ‘창’ 이었다.

사람들은 장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통해 새로운 문명을 깨우치고 다시 장을 통해 자신을의 생각을 주장했다. 또 농사일에 쉴 틈이 없는 농민들은 장날이 휴식과 오락을 접할 수 있는 드문 기회였던 것이다.
그뿐 아니였다.

서민들의 꿈과 삶의 정열이 서린 곳이기도 했다. 유학간 아들이 학비에 보태고자 나락값을 입도선매하고 점심도 거른체 막걸리 한사발에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던 가난한 아버지의 자식을 향한 꿈이 있는 곳이었다. 장돌뱅이들의 장타령에 온갖 시름을 떨쳐 버리기도 했고, 술 한 모금에 호남가를 걸쭉하게 불러 제낄 수 있는 흥이 넘치는 곳이기도 했다.

자기 집 텃밭에서 솎아 나온 아직 덜 다듬어진 채소 한웅큼을 펼쳐놓은 아낙들이 삶의 정열 또한 숨쉬는 곳이 바로 우리의 전통 시장인 것이다.

대형마트나 할인점의 등장으로 날로 쇠퇴를 거듭하는 현대에도 명절이나 집안의 큰일을 치르려면 장터에 가야한다. 덤으로 얹어주는 넉넉함과 흥정의 즐거움이 있고, 살아있는 한국을 볼 수 있는 삶의 진지함과 생기가 넘쳐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단지 물건을 사고파는 경제논리에 지배되지 않았던 우리의 장터. 바로 이 속에서 민초들의 생활문화가 꽃피웠고 이 생활문화가 바로 오늘날 대중문화의 뿌리가 된 것이다.

함평 재래시장의 어제와 오늘

7일 찾아간 함평읍의 시장은 예전보다 쇠퇴해졌다는 느낌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적막한 기운이 감돌았다. 벗을 찾아 10리길을 머다않고 찾아와 낮술 한잔에 불콰해진 얼굴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던 아저씨도,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매달려 주전부리를 파는 가게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아이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좌판에 앉아 더덕이나 고사리 등, 집에서 기르거나 산에서 따온 나물로 가득 채운 올망졸망한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나온 할머니들이 하나 둘, 수십여년 시장에서 삶을 꾸려 온 상인들과 인근 지역의 재래시장을 오가며 장사를 하는 장돌림들의 삶에 절은 모습들, 그리고 옛 정취를 잊지 못해 생필품이나마 이 곳 장에서 구하려는 노인네들이 장터를 순회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함평에서 해보와 가장 장(場)이 크게 선다는 함평읍장(場)이 이럴진대 다른 재래시장의 모습이야 불을 보듯 뻔하다.
함평은 2000년을 전후한 최근까지 7개 읍면에서 재래시장이 5일마다 서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5개의 재래시장만이 그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하나 찾아가 보자.

먼저 ‘큰소장’이라 불리며 “함평 소값이 전남의 소값을 좌우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전남지역에서 세손가락 안에 꼽히는 큰 규모를 자랑했던 함평읍장은 대부분의 큰 장이 그러듯 매월 2일과 7일이면 장이 선다. 이 우시장 때문에 함평의 한우가 널리 알려졌고, 아직까지 큰 장세를 유지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읍장은 역사적인 장소로도 이름 높다. 정한순이란 이름을 조선 전역에 알리며 농민군의 기치(旗幟)를 높였던 곳도 바로 함평읍장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읍장은 1960년대에 옮겨진 곳이다. 1950년대 후반까지의 읍장은 함평읍 기각리 구시장 마을로 바로 영수천 주변이었다. 당시는 적촌리(赤忖里) 장시라 불리었으며 읍전시(邑前市)라고도 불리기도 했었다. 아직도 이곳 구시장 마을을 촌로(村老)들은 적촌리라고 부리기도 한다.

동학이나 3·1운동, 그리고 널리 알려진 함평고구마사건 등 역사적인 사건이 있을 때마다 함평군민들과 명암을 같이 했던 읍장은 근래에 있어서도 아직까지 남아있는 예스러움 때문에 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촬영 장소로 각광받는다.

1996년 개봉된 박상민, 최민수 주연의 「나에게 오라」는 1970년대 시골 장터를 배경으로 건들로 살아가는 두 젊은이의 삶을 그린 영화로 시장 주변에 사람들이 단역 배우로 출연해 함평군민들에게는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2003년도 완성되어 2005년 필라델피아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고, 광주국제영화제에서 폐막작으로 선보였던 배창호감독의 「길」또한 읍장에서 쵤영됐다. 이 작품에서는 배창호감독이 주연까지 맡아 열연했다. 떠돌이 대장장이의 삶을 그린 가슴과 마음이 따뜻한 진솔한 풀무질영화로 2006년 개봉됐다.

이렇듯 1970년대의 예스러움이 남아있는 까닭에 영화의 촬영 장소로 각광받았지만 그 예스러움은 장을 이용하는 주민들에게나 상인들에게 불편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래서 시작된 읍장의 현대화 작업은 2002년부터 시작되어 장옥 교체 및 하천의 정비 사업이 2004년 4월 완료되었고, 현재는 산뜻한 모습으로 탈바꿈됐다.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옛 모습들

읍내 장과 함께 가장 활성화된 모습을 보였던 해보 5일장은 3일과 8일에 장이 선다. 선치장으로 불리며 조선시대부터 장세를 유지했고, 흔히 문장이라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장성~함평간 국도와 영광~광주간 국도가 교차하고 있는 편리한 교통으로 인해 장의 기능이 많이 상실됐음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해보장은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왕골로 만들어진 돗자리를 파는장으로 유명했다. 장이 서는 날이면 새벽부터 전국 각지의 상인이 모여 들였고, 장날이면 돗자리를 머리에 이거나 지게에 짊어진 사람들로 끊이지 않았다. 하루에 거래되는 돗자리가 줄잡아 4천여 장으로 돗자리의 거래는 날이 새기가 바쁘게 시작되어 새벽 여섯시쯤에 가장 붐비며 일곱시가 채 못 되어 끝났다고 한다.

해보 5일 시장에는 광주, 목포, 전주의 장사꾼은 말할 곳도 없고 멀리 서울과 부산의 장사꾼까지 몰려들었다. 해보장은 2005년 장옥이 현대화된 모습으로 교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음은 명맥이나마 유지하고 있는 학교, 나산, 월야의 5일시장이다.

먼저 5일과 10에 장이 서는 학교장은 함평의 관문이 되는 교통의 요지이다. 또한 호남선이 면의 중앙을 통과하고 있는 관계로 그 필요성에 의해 일제강점기 이후에 생겨난 장이다.

학교장은 한국전쟁이후 옛터에서 철길과 다리사이로 옮겼다가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학교 5일시장은 가마니장으로 유명한데 예전에는 인근의 금송리, 석정리, 월호리 등지에서 양질의 가마니를 생산했었고 이런 가마니를 팔러 온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현제 장에서는 피복, 잡화, 지물, 고무신, 채소, 어물전 들이 열리고 있다. 주로 무안, 함평 등지의 사람들이 이용하며, 옛 정취를 잊지 못하는 촌로들의 발길이 멈추지 않고 있다.

나산 장은 1770년대 이전에 만들어진 유서 깊은 시장이다. 현재까지도 그럭저럭 장세는 유지하고 있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 우시장이 열렸었다, 우시장이 열렸을 때만 해도 상당히 큰 장세를 유지하고 있었고, 시장 안에는 손으로 직접 면을 뽑는 중화요리집이 있어 시장의 명물로 자리하기도 했다.

월야시장은 5일과 10일이 장의 개시일이다. 지리적이 위치상 해보장과 근접해 있는데 일제강점기 이후에 장은 생겨났다. 광주로 시내버스가 다닐 정도로 광주와 밀접한 생활권을 이루고 있어 장은 쇠퇴했으나 터미널 주변에 상권의 발달로 주민들의 생활은 큰 불편을 겪지 않고 있다.

한편 2000년을 전후하여 함평에는 두 곳의 시장이 사라졌다. 손불장과 신광장이 바로 그곳이다. 5일과 10일이 장이 서는 날이었던 신광장은 이미 1770년대 이전부터 자리하고 있었던 유서 깊은 시장이었다. 일제시대에는 사천장 또는 사납장이라 불리기도 했다.

인근에 가리역이 있었고 면소재지에도 숙박시설이 많이 있었던 관계로 조선시대부터 장시로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3명의 상인이 나와 점포를 운영하고 있었으나 1994년 4월 17일자로 본점이 완전 폐지되었다.

1일과 6일이 장시 개시일 이었던 손불장은 일제강점기 이후에 생겨난 시장이었다. 해안과 평야가 함께 위치하고 있는 손불면은 군에서 두 번째로 큰 지역으로 인구 또한 함평읍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지역이다.
하지만 군의 북서부 해안을 따라 자리하고 있는 면의 특성과 지방도로만 연결되어 있는 불편한 교통 사정은

상인들이 순회지역에서 제외될 수 밖에 없었고, 여기에 농협구판장과 슈퍼마켓의 등장은 시장의 빠른 쇠퇴화를 가져왔다. 손불장 또한 신광장과 마찬가지로 2000년대 초반까지 밭에서 키운 풋거리 들을 판매하는 상인들이 드문드문 눈에 띠었으나 2002년 1월 10일자로 본점이 완전 폐지되어 그 터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지역문화상품과 연계로 새로운 활로 모색을

그래도 사람 사는 맛을 보려면 장터를 가라 했다. 그럼에도 자본의 영세성과 저생산성, 운영의 전근대성 등의 이유로 항시 근대화 작업의 표적이 되어 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 여기에 대형 할인점의 등장은 더 이상 장터의 존재 필요성을 의심케 하고 있다. 그러나 유통구조의 단순화와 시설의 현대화만이 대한민국 시장구조가 모두 개선된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재래시장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어떤 방안들이 있겠는가.
먼저 지역문화상품과 연계해 새로운 활로 모색을 꾀해야 한다. 외국 관광객의 경우 우리의 정겨움과 흥이 넘치는 재래시장을 훨씬 매력 있어 할 것이다. 이는 관광 상품으로 개발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전통방식의 재래시장에 문화· 관광 상품을 집중 배치해, 전통문화와 생활풍속등을 특화하는 방안을 모색하면 문화 ·관광 상품으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다. 여기에 지방의 영세한 자본과 기술에 의해 생산 활동을 하는 농가의 수공예품 판로 확보를 위해서도 이 같은 문화상품의 개발과 판로 확보는 재래시장 활성화의 한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시장으로의 접근로와 주차장 확보가 돼야 한다. 재래시장의 활성화는 건물의 현대화만이 우선이 아니다. 시장으로 접근하는 도로가 전부 시장이기 때문이다. 이 시장에서 상품을 쉽게 사고 팔 도로의 확보는 필수적이다.

시장의 현대화를 위해 필연적인 도로 정비는 국가나 지자체의 몫이다.
물건을 실은 트럭을 시장 어디서나 접근하여 끌고 갈 도로가 마련돼야 한다. 현대인이 가장 부담을 느끼는 것은 시장에서 산 제품을 운반할 방법이 문제이고 길이 문제였다.

이 간단한 방법을 두고 시장을 개축하여 부담을 주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방법은 못된다.물건을 실은 트럭은 시장에서 종합으로 마련하여 길의 입구마다 세워놓더라도 시장 내의 접근로의 확보는 국가나 지자체가 책임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제품의 다양화와 특성화다. 재래시장의 상품은 대형할인점과 달리 제품의 특성에 따른 구매처가 다양하다. 또한 대형할인점이 규격화할 수 없는 제품의 특성이 있다. 하지만 많은 재래시장들이 이를 포기하면서 대형할인점화 하려고 한다. 제품의 다양화와 특성화를 포기하면 할수록 재래시장의 경쟁력은 잃을 수밖에 없다. 백화점이나 대형할인점화 하려면 그만한 투자를 해야 하지만 그 투자는 재래시장의 활성화에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장터에는 한국인, 특히 민중들의 혼과 얼이 담겨있다. 또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법이 아닌 그들만의 질서가 존재하고 있다. 그 질서는 수백년 이어온 오랜 전통으로 큰 무리 없이 지금까지 정터를 유지시켜 온 지킴이였다. 그 질서를 존중하고 지속적으로 지켜질 때 시장은 오랜 기간 서민경제의 근간으로 자리하고 남아있을 것이다. 행정기관의 지나친 규제는 오히려 시장의 발전에 불필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서민경제가 바로 서야 사회가 풍요로워진다. 서민경제를 살리지 못하면 풍요로운 사회가 되더라도 사회의 전반적인 발전에는 오히려 저해가 됨은 자명한 이치이다. 이를 극복하거나 예방하기 위해서는 재래시장, 특히 5일장이 가지는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장터에는 우리 선조들, 그중에서도 민중들의 꿈과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곳은 그들 삶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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